조은 시 모음 / 시 읽기
모순1
조은
삶의 갈래
그 갈래 속의 수렁
무수하다
손과 발은 열 길을 달려가고
정수리로 치솟은 검은 덤불은
수만 길로 뻗는다
끝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지 못한 진창에서는
바글바글 애벌레가 기어오른다
봄꽃들 탈골한 길로
단풍 길 쏟아진다
손가락마다 지문을 새겨 살아도
내 몫이 아닌 흙이여
덩굴
조은
두 남자가 간다
한 남자는 젊었고 한 남자는 늙었다
젊은 남자는 키가 크고 늙은 남자는 키가 작다
키 큰 남자는 쭉 곧았고 작은 남자는 휘었다
곧고 키 크고 젊고 잘생긴 남자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의
갈고리 같은 손은
농익은 흙내를 풍긴다
날마다 동이 트기 전 적어도 세 번은
부정하고 싶을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의지한 아들의
머리카락은 윤기 있고 콧날은 높고 어깨는 넓다
탄력 있어 보이는 허리는
산도 번쩍 들어 올릴 듯하다
온갖 전광판이 빛을 쏘아대는 길에서
아버지가 잡고 있는 아들이
위태로워 보인다
꽃이 지는 길
조은
길을 가려면 꽃길로 가라
꽃길 중에서도
꽃이 지고 있는 길로 가라
움켜잡았던 욕망의 가지를 놓아버린 손처럼
홀가분한 꽃들이 바람의 길을 가는
그 길로 가라
꽃들은 그늘지고 어두운 곳까지 나풀나풀 다가가고
꽃이 진 자리는
어느 순간 당신 삶의 의미를 바꾸리라
그러면 오랜 굴레에서 풀린 듯
삶이 가볍고 경쾌하리라
그 길로 가다 보면
수밀도에 흠뻑 취할 날이 있으리